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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내몰래 첫사랑 생각은 유죄(?)
작성자
경일인 | 2003-07-25 | 216
아주 은밀한 이야기 하나 하렵니다. 별 빛 한 줄기 문틈 사이로 끼어들지 못하는, 이렇게 깜깜한 밤이면 언젠가는 꼭 털어놓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어쩌면 문틈 사이로 솔솔 새어나간 내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과일장수 확성기에서 울려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이놈의 응어리를 콱 뱉어내버리고 싶습니다. 일년 전 꼭 이맘때인 것 같습니다. 사륵사륵 상사화 잎 지는 소리가 꼭 첫날밤 꽃색시의 옷 벗는 소리 같이 들리는 밤이었습니다. 그날따라 까페에 손님이 일찍 끊어져버린 탓에 꿩알 같은 불빛을 동무 삼아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를 시샘하고 비웃기라도 하듯 희미한 달빛을 등에 업고 까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까페를 찾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알콜이 까만 눈동자를 먹어버려 앞뒤 분간을 못하는 남자들뿐이었습니다. "에그, 오늘 역시 새벽별을 보아야 잘 수 있겠구만?" 혼잣말로 푸념을 털어놓으면서 밉살스런 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불빛에 생겨나는 얼굴을 보고 나는 하마터면 쿵하니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였습니다. 초가지붕 위로 시린 달빛이 내린 날 밤, 꼭 그 시간에만 피어나는 하얀 박꽃 그리고 그 박꽃을 닮은 여자, 아! 첫사랑 그녀인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만 볼트 전기가 내 몸을 관통하여 땅속 깊이 내리꽂고 있는 것 같은 전율 때문에 한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떡해야 하나? 어디론가 숨어버릴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볼까? 나를 알아보면 어쩌나? 혹시 나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을까?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상상이 교차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저씨, 여기 주문 안 받아요?" 아! 여리게 쟁쟁 울려퍼지는 저 목소리! 분명 그녀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틀림없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어떻게 그녀 앞으로 다가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두 눈을 꼭 감고 그녀 앞에 섰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가까이서 얼굴을 쳐다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쿵하고 심장의 맥박이 일순 멎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요. 억지로 딴 데다 시선을 붙여 놓고 있는 나를 보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불렀습니다. "아저씨! 어디를 봐욧!" "예에?"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리 딴 데만 쳐다봐요?" 숙였던 머리를 들고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딴 데만 바라보고 있는 부끄러운 내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그토록 가슴을 요동치게 했던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전부 들어왔습니다. "휴우..." 나는 안도의 고른 숨과 실망의 한숨을 섞어 쉬어야만 했습니다. 그녀를 무척이나 닮은 젊은 아가씨였던 것입니다. 멀리서 봐도 아리따운 아가씨였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십여 년도 훨씬 전인 그녀의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웠습니다. 한 가지 고백컨대, 부실한 사랑니의 치통 때문에 가끔씩 단꿈이 갈아엎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언뜻 언뜻 보였다가 사라지는 사람이 바로 첫사랑 그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평소에는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그녀이었건만 치통으로 바르르 몸을 떨고 땀을 뻘뻘 흘려야 할 때만 그녀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내나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한심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치통이 내 꿈을 갈아엎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꿈이 깨고 난 새벽 긴 시간을 샅샅이 갈아엎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부쩍 사랑니의 통증이 심하더니 기어코 그런 우스운 환시에 빠져든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혼자였고 나 또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녀 앞에 앉아 짧은 시간이라도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온 손님에게 첫사랑 그녀를 많이 닮았다는 이유로 시시콜콜한 말을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먼 데 앉은 그녀의 자리만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도수 낮은 술 몇 병을 비우고 맨 처음 달을 등에 업고 들어왔던 것처럼 달빛을 다시 보듬고 까페를 나갔습니다. 그 뒤로 그녀는 하루 건너서 며칠간을 꼭 그 시간에 들르곤 하였습니다. 맨 처음처럼 늘상 혼자인 채로 말입니다. 한 가지 묘한 일은 날이 갈수록 그녀가 첫사랑 그녀와 꼭 닮아져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날부터 나는 십여 년 전 그녀와 연애하던 시절로 칭칭 감겨 들어가는 착각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녀와 단 둘이서 바닷가를 거닐며 꼭 닮은 발자국을 찍어내기도 하고, 풍경 좋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서로의 미소 속에 서로를 비춰보기도 하고,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인연의 끈처럼 두 손을 꼭 맞잡고 걸어 다니고, 귀가 시간이 지나서 서로의 집 앞으로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는 애틋한 시간을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쓰고 있던 글의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묵언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나 아이들도 나의 좋지 않는 습관 때문에 덩달아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람이 갑자기 말문이 트이고 입가에는 실로 묘한 미소를 담고 다니자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입니다. 남편이고 아빠인 사람의 부도덕한 내면은 전혀 모른 채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다섯 번 째 까페를 찾아왔던 날인 것 같습니다. 올 때마다 그녀는 미소를 한 송이 장미처럼 던져 주었기 때문에 나 또한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인 것 같지만 조금만 더 그녀와의 만남이 지속되었다면? 아! 그러나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다음만 생각하면 눈앞이 칠흑처럼 깜깜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은 그녀에게 모래시계처럼 점점 허물어져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잠깐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바쁘지 않으시다면요..." 아! 드디어 그녀를 가까이서 한 뜸 한 뜸 뜯어 볼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아, 그럼요." 테이블 앞에 덥석 앉은 나를 보고 그녀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하였던지 망설이는 표정이었습니다. 얼마나 애타게 바라던 나의 속마음은 전혀 모른 채로 말입니다. "저... 실은 제가 요번에... 땅끝마을에다 까페를 열려고 그러거든요?" "예에? 땅끝마을에 까페라니요?" "죄송해요, 사장님... 실은 제가 이 분야에 완전초보라서요, 이 까페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워볼 수 없을까 찾아왔는데 그 동안 용기가 없어서 여쭤보지 못했어요. 실례가 안된다면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예에! 뭐라고요?" 나는 결국 그날 밤 외마디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그녀의 강하게 흡인하는 눈빛에 그만 주방 일자리를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보수도 작고 일손이 부족한 터인지라 아내도 흔쾌히 허락해주었습니다. 남편이 마음 속으로 며칠 동안 밤마다 싸돌아다니는 외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녀는 두어 달간의 연수(?)를 마치고 무사히 땅끝마을에 카페를 열었습니다. 종종 듣기로는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생각으로는 씁쓸하게 엉기는 뒷맛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그녀를 옛사랑의 그녀로 생각하는 이유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같이 일하면서 치통 뒤에 찾아오는 첫사랑의 환상을 많이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때론 불현듯 생각나기도 하였지만 이제 어느 곳에서 우연히 옛사랑을 만난다 하면 아주 담담하고 냉정하게 내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1년 전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려서 깊은 바다에 난파되어 버린 그때의 상황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있는 뒤로 나는 여태껏 아내에게 나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술좌석에서 술김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내 등을 토닥거리며 무덤까지 가지고 가라하였습니다. 가슴속에 '연둣빛 사랑의 이파리' 한두 개쯤 달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위로의 말을 하면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혹시 아는감? 자네 마누라는 자네보다 더 애틋한 사랑 하나쯤 묻어두고 있는지 말야... 하하하' '그리고 자네 마누라가 그 묻고 있던 옛사랑을 다시 들춰내지 않도록 잘하란 말야. 자네 마누라 마음 속에 자네의 사랑을 가득 채워 놓으란 말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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