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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일이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등산복을 차려 입으시고 동생놈과 함께 집을 나설 차비를 하셨다. 아버지는 일요일 아침마다 그렇게 동생놈을 데리고 관악산으로 등산을 다녀오셨다. 밤새 지린 오줌에 흠뻑 젖은 팬티를 방바닥에 깔아놓고 애가 타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방에서 끌고 나가시더니 대뜸 “정우두 데리구 가요” 하며 등을 떼밀었다. 자식들 중에 나란 놈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었던 의도였을 거다.
아버지는 따라와라, 집에 있어라,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눈살만 찌푸리시며 동생놈만 데리고 휑하니 나가버리셨다. 난 까까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와 동생놈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버지는 내가 따라오든 말든 동생놈과 함께 버스 정류장을 향해 성큼성큼 가셨다. 뻘줌한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이러다간 아버지랑 동생놈이 타는 버스를 놓치겠다 싶어서 짧은 다리를 바둥거리며 속도를 높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버스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시더니 동네를 한바퀴 빙 돌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왜 그냥 왔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오늘 산에 안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안방으로 들어가버리셨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아버지가 날 창피해 하는구나’. 아, 그 충격이란….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서러움과 자괴감이란….
나는 우리집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위로 누나와 형이 있고 아래로 막내동생놈이 있는데, 누나는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사랑받고 형은 장남이라고 사랑받고 동생은 막내라고 사랑받고…. 하지만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인 난 사랑은커녕 사람 대접도 못받고 살았다. 누나는 피아노 학원에, 형은 태권도장에, 동생은 아버지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을 때 난 동네 야산에서 ‘짱돌’을 들고 머리통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져가며 전쟁놀이를 했다.
그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 빡빡 밀고 땟국물 질질 흐르는 티셔츠에 쫄쫄이 반바지 차림으로 식구들 틈에 어색하게 끼여있는 난 영락없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날 첨부터 그렇게 내팽개치고 집도 절도 없는 놈처럼 키웠을 리는 없을 거다. 잡아다 씻기고 입히다가 도저히 힘에 부쳐 ‘내가 뭘 먹고 이딴 걸 낳았나 몰라’ 하며 포기했을 게 뻔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사건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까마득히 먼 폭으로 벌려놓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와 난 세마디 이상 대화를 주고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삭막하고 싸늘한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오며 살았다. 성인이 된 내가 영화를 한답시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닐 적엔 그 꼴이 영 못마땅하셨는지 아버지는 한층 더 굳게 입을 다무셨고, 명절 때마다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형과 동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시키셨지만, 난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었다. 그 흔한 부자지간의 정이란 게 아버지와 나 사이엔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이젠 그딴 거 없이 살아도 별 문제 없다, 하는 식으로 포기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치른 뒤 온 가족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어느 바닷가 항구 마을에서 우연찮게 아버지와 단둘이 술과 안주를 사러 구멍가게에 가게 되었는데, 이것저것 고르시던 아버지가 뜬금없이 주인 아줌마에게 이러시는 거였다.
“아줌마, ‘신라의 달밤’ 봤소?”
“신라… 뭐요?”
“신라의 달밤!… 영화 말요, 영화!… 얘가 쓴 거요, 얘가!”
영화는커녕 TV드라마도 제대로 안볼 것 같은, 그 후미진 항구 마을 구멍가게 아줌마를 붙잡고 아버지는 내가 쓴 영화 제목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하셨다. 왜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걸까…. 등신같이….
〈박정우/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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