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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내린 여름장마비는 밤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영등포역 지하 상가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맹인 악사 김씨는
<선구자>를 막 끝내고 시계를 만져보았습니다. 일반인들의 시계와는
달리 시계 바늘이 밖으로 돌출 돼 있는 맹인용 시계는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집어넣었습니다. 바구니에 담긴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낡은 비닐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용 흰 지팡이를
길게 뽑아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때 지팡이 끝에 한 남자의 발이
걸렸습니다. 뜻밖에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저씨,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시려고 그러세요?」
「괜찮습니다. 늘 이렇게 다니는걸요.」
김씨는 그 청년에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하도 출구를
향하여 발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얼른 김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상가 건너편 카메라점에서 일하는 최철호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저씨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지요. 아저씨의 열렬한
팬이라고나 할까요. 전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 예에,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김씨는 청년이 자기의 팬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댁이 어디세요? 버스 타고 다니세요? 제가 버스 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죠.」
「아니, 괜찮습니다. 집은 봉천동이지만 늘 다니던 길이라 잘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지금은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는걸요.」
어느새 청년은 지하도 계단을 오르는 길씨의 팔을 가볍게 잡아 주고 있었습니다.
김씨는 그런 청년의 호의를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메말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같은 사람이 이 정도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인심이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 바이올린 이리 주시죠. 제가 들어드릴게요.」
김씨는 청년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와서 안 되겠어요. 집에다 전화를 해서 가를 오라고
해야겠어요, 제가 자가용으로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가만 있자, 공중전화가
어딨더라? 아 저기 있군요. 이리 오세요. 저기 공중전화 있는 데로 잠깐 같이
가시죠.」김씨는 청년을 따라 공중전화가 있는 데로 갔습니다.
청년이 집으로 전화를 걸기 위해서 공중전화 부스 속으로 들어가자 김씨도
비를 피하게 위해 그 옆에 있는 부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10여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전화를 걸던 청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최선생! 최선생!」김씨는 전화부스 칸막이를 손으로 두드리며
청년을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대답 소리를 들리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청년이 들어갔던 전화부스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버린 청년을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년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탄스러웠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지 않자 평소 별로 말이 없던 옆방 주인 남자가 자다가
일어나서 112에 신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새벽 세 시경에 경찰이 찾아와서 김씨의 진술을 받아갔습니다.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후 김씨는 마냥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일을 나가고 싶어도 바이올린이 없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지하철을 타고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 행각이라도 하자고
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찾아온 신문기자를
붙들고 호소했습니다.
기사가 난 다음날, 한 악기 제조 회사의 사장이 산동네까지 그를 찾아와
바이올린 한 대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김씨는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다음날부터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영등포역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 뒤 2년이 지난 어느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김씨의 발 아래에 조용히 바이올린 한 대를 두고 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 청년이 김씨한테 바이올린을 주고
가는지 몰랐으나 김씨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바이올린을 돌려드립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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